영어강의는 당연한 미래일까? 필요하지만 그것이 서울대의 국제화 포석의 핵심은 될 수 없다고 본다.
나는 들었다. 우리 학술계의 역사가 중국이나 일본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 하나. 우리는 축적되지 않은 역사, 단절의 역사라고 한다. 중국은 천 년 이상 축적된 책들을 지금도 읽고 이해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고, 일본은 서구와 동아시아의 학술성과 일본어로 번역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이 삼백 년을 넘었다고 한다. 우리는 다르다. 나는 우리 조상의 기라성 같은 저서들을 읽을 수가 없다. 외국어(중국어)로 쓰여 있기 때문이다.
기우일까? 모든 학문이 오리지널을 능가하는 것은 항상 어머니의 혀(모국어)로 달성된다고 한다. 영국 과학기술은 라틴어나 불어로 꽃피지 않았다. 중국 불교는 산스크리트어로 인도를 넘어서지 않았다. 반면 우리의 성리학과 불교는 중국어로만 머물렀고, 중국의 것을 넘어섰다는 소식은 드물고 아스라할 뿐이다. 지금은 영어로 같은 과거를 반복하고 있다. 단절될 것이고, 오리지널을 넘기 벅찰 거라고 본다.
모국어로 공부하기란 어떤 걸까? 예를 들어 “만유인력”, “universal gravity”라는 용어를 보자. 누구에게나 “만유”의 뜻이 쉽게 전달될까? 아마도 대다수는 소리로만 건성으로 지나칠 것이다. 영어(중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느낌을 살려 “universal gravity”(“완요우인리”)를 우리 식으로 읽으면 “만유인력”이 아니라 “어디나 있는 끄는 힘”일 것이다. 쉬운 모국어가 아니라면, 소리로만 이해 없이 주입되는 전문용어일 뿐이다.
이렇게 외국어로 겉도는 이해를 쌓아가게 되면, 그 결과는 깊은 공부에 필요한 뒷심 부족으로 나타날 것이고, 깊은 공부를 달성하는 인구는 그 만큼 쪼그라들 것이다. 카오스 이론을 빌려 말한다면, 결과의 엄청난 차이는 초기조건의 미세한 차이에서 온다고 한다. 영어강의는 잘못된 초기조건이라고 본다. 서울대생이라면 영어소통에 능해야 하는 것은 기본. 우리는 그 너머를 지향해야 한다.
“Rede Lecture Series”라는 것이 있다. 캠브릿지 대학에서 일반 대중을 위한 강연 시리즈로 현종 때(1668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들은 라틴어나 프랑스어로 연구하고 강의하고 저술하지 않았다. 저변을 넓히고 토양을 풍부하게 하는 것은 모국어를 통해서 밖에 없다고 판단했고, 모국어로 캠브릿지가 생산하는 지식을 대중들에게도 열심히 강연하는 시리즈까지 시작한 것이다. 중국어로 소수끼리만 소통하며 서서히 망해갔던 조선과 너무 대조되는 점이었다.
우리와 비슷한 인구의 영국이 모국어로 힘차게 축적한 지식들. 그러다 보니 패러데이(Faraday) 같은 인물을 놓치지 않고 키워냈던 것이다. 영국 국민이 그 어느 누구보다 사랑했다던 과학자. 지금의 전자기 문명의 아버지인 패러데이는 책제본 공장의 불우한 노동자였다. 하지만 그가 제본하는 과학서적들이 모국어였던 덕택에 그는 제본소로 들어오는 모든 책을 읽으며 당시의 과학기술을 익혀갈 수 있었다. 모국어 토양 덕택에 이런 재능들이 고사되지 않고 소중히 자랐던 것이다. 일본이 모국어로 꾸준히 축적한 성과들. 덕택에 지금 일본은 다나카 같은 중소기업 직원이 노벨상을 받는 나라가 되었다.
서울대에서 시작됐으면 한다. 쉽고 수려한 모국어 전공서적 집필 사업. 따사로운 모국어로 권위 있는 전문서적들이 축적되지 않으면 한국의 실력은 깊은 숲으로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국제화가 필요하면 할수록 더욱 필요하다고 본다. 얇은 실력이 아니라 울타리 없이 경쟁할 힘찬 실력을 키우는 두터운 토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업의 물결이 영어강의로 찰랑이는 캠퍼스의 표면 아래를 도도히 흘렀으면 한다. 이렇게 초기조건을 제대로 세워가면서 먼 훗날 큰 차이의 과실을 나누며 존경 받는 서울대. 이게 아니라면 서울대는 조선의 성균관처럼 박제로만 남을 역사를 반복하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