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년 전 토마스 쿤은 과학 발전이 패러다임 변환을 거듭하며 발전한다고 설파했다. 한 시대동안 정립되고 통용되던 모델이 짧은 기간 사이에 전혀 새로운 모델로 대체된다는 것인데 과학뿐만 아니라 기술·예술·사회과학에서도 적용되는 일반개념이 됐다.
패러다임 변환이 극명하게 잘 드러나는 분야로 컴퓨팅 모델을 들 수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컴퓨터 기술은 획기적으로 발전했으며 새로운 거대 산업과 생태계를 창출했다. 컴퓨팅 모델의 패러다임 변환은 하드웨어(HW)·소프트웨어(SW)·네트워크·응용분야에서 고루 일어났으며 플랫폼의 패러다임 변환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메인프레임 컴퓨터·미니컴퓨터·워크스테이션·PC라는 플랫폼을 거쳐 지금은 스마트폰 플랫폼이 컴퓨팅 모델의 주축이 됐다. 네 번의 패러다임 변환을 거치는 동안 기술은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새로운 산업이 탄생했다. 인류사회는 정보기술(IT) 기반으로 빠르게 변모했다. 한편으로 컴퓨팅 플랫폼의 패러다임 변환을 주도하지 못하거나 이에 적응하지 못한 과학자나 기업은 순식간에 도태되기도 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글로벌 IT 10대 기업 명단을 보면 패러다임이 바뀔 때마다 구시대의 강자들이 사라지곤 했다.
한국은 모바일 컴퓨팅 플랫폼으로의 패러다임 변환에 탁월하게 대응해 글로벌 리더 국가가 됐다. 반도체·단말기·네트워크·다양한 응용을 조합한 한국 제품이 세계 곳곳에서 위력을 떨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세상이 스마트폰 플랫폼으로 컴퓨팅 패러다임 변환을 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이 이토록 각광을 받을 수 있었을까. 만약 다음 패러다임 변환이 쓰나미처럼 수년 내에 또 몰려온다면 지금의 성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걱정이 서서히 설득력을 얻어 가고 있다.
새로운 컴퓨팅 패러다임은 반드시 온다. 단지 언제 어떻게 올 것인가를 잘 모를 뿐이다. 스마트폰 플랫폼을 이을 여섯 번째 컴퓨팅 패러다임을 가장 잘 설계하고 개발할 과학자와 기업이 누구일까. 한국이 주도할 수 있을까. 새로운 시대를 여는 화두로 IT에서 이보다 적절한 주제는 없을 것이다.
PC 시대에는 PC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단으로 보였으나 이동성·휴대성·응용의 다양성에서 밀려 결국 스마트폰 패러다임이 탄생했다. 스마트폰 예찬자들은 모든 문제를 스마트폰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나 아마도 보안·실시간 서비스·복잡성·가상-물리 통합에서의 약점 때문에 이를 보다 잘 해결할 컴퓨팅 패러다임에 무릎을 꿇을지 모른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라고 하지 않는가. 한편으로는 클라우드·빅데이터·사물통신·미래인터넷으로 현재의 약점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컴퓨팅 플랫폼을 개발해야 하겠다. 한국 기업이 지닌 강점인 반도체·HW·네트워크를 최대한 부각시키며 미래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디바이스·새로운 아키텍처·새로운 제품을 지금부터 고민해야 한다. 외부에서 불어온 패러다임 변환에 적응하며 생존하는 것이 과거 전략이었다면 이제는 패러다임 변환을 주도해 세상을 변화시킬 때이다.
최양희 서울대학교 교수 yhchoi@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