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중앙일보 2020년 10월 25일자 [문병로의 알고리즘 여행]
어떤 학문 분야에서 엉뚱한 분야의 사람이 결정적인 영감을 주고 발전을 이끄는 경우가 있다. 1968년 23살의 낸시 웩슬러는 어머니가 헌팅턴병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신체가 춤추듯 움찔거리고 끝에는 정신도 나가버리는 유전병이다. 부모 중 한 명이 환자이면 자식의 발병 확률은 50%다. 낸시와 엘리스 자매는 평생 자식을 갖지 않기로 결정했고, 낸시는 이 병의 연구에 평생을 바치기로 한다. 낸시는 72년 미시간대학에서 심리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된다.
인간의 DNA는 A·C·T·G라 이름 붙은 4개의 기호가 30억개 정도 연결되어 있다. 이 30억개는 23쌍의 염색체로 나누어져 있다. 낸시의 여정은 이 30억 길이의 띠에서 하나의 유전자를 찾는 것이었다. 백사장에서 쌀알 찾기 같은 일이다.
처음에는 헌팅턴병이 느리게 자라는 바이러스 탓인지 의심하던 수준이었다. 낸시는 환자의 뇌에서 시료를 추출해 침팬지의 뇌에 주사해 보기도 했다. 결국은 바이러스가 원인은 아니고 유전자를 찾는 것으로 방향이 잡혔다.
심리학자인 아버지 밀턴 웩슬러와 낸시는 유전병 재단을 만들어 과학자들과 함께 워크숍을 거듭했다. 뜬금없는 아이디어가 속출했다. 낸시가 참석자들을 독려했다. “지금 단계에서 누가 유용한 아이디어와 실수를 구분할 수 있겠어요?” 주변을 들뜨게 하는 비범함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DNA는 너무나 방대하기 때문에 탐색하기가 막연하다. DNA 내부에 마커를 설정해야 한다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마커는 도로의 이정표 같은 것이다. 암수가 교접하면 두 DNA가 절단되어 섞인다. 마커와 어떤 유전자 사이가 절단되면 같이 자식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절단 점이 임의로 정해지므로 가까이 있을수록 같이 전해질 확률이 높다. 여러 마커를 만들어두고 헌팅턴병 환자의 DNA에서 유독 높은 비율로 존재하는 마커가 있으면 그 마커 근처에 헌팅턴 유전자가 있을 거라는 논리였다. 실패가 거듭되었다. 1983년 드디어 환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마커를 발견했다. 4번 염색체에 있었다.
이제 범위가 좁혀졌다. 낸시의 여정 15년 차쯤이다. 그렇다 해도 범위가 30억 크기에서 1억 정도로 좁혀진 것이니 갈 길은 멀었다. 6개의 국제 연구팀이 만들어졌다. 10년간 실패를 거듭한 끝에 드디어 93년에 헌팅턴병을 일으키는 DNA 서열을 발견한다. 낸시의 여정 25년 만의 일이다. 그동안 낸시는 끊임없이 환자들을 만나서 역학조사를 하고 1200본이 넘는 혈액 샘플을 채취해서 과학자들에게 제공했다.
과학적 성공은 대부분 실패의 기록이다. 가물에 콩 나듯 발견되는 몇몇 결과들이 성공을 만든다. 25년이란 시간을 좌절하지 않고 한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 힘은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과정에서 마커 관찰, 유전자를 이어 붙이는 방법을 비롯해서 많은 아이디어들이 도출되었다. 후에 휴먼 지놈 프로젝트가 인간 DNA 전체의 염기서열을 규명하게 되는데 여기에 결정적인 바탕을 제공한 한 사람을 들라면 낸시 웩슬러다. DNA 염기서열은 기계가 연속해서 읽을 수 있는 길이가 극히 제한된다. 그래서 서로 중복이 있는 조그만 조각들로 잘라 전체 서열을 추정해야 한다. 변이로 인한 에러까지 감안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컴퓨터 알고리즘 연구자들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로 인해 DNA 서열분석이라는 분야가 만들어졌고, 확장을 거듭해 생물정보학이라는 거대한 분야가 만들어졌다. 빅데이터의 대표적 응용 예다.
헌팅턴병은 4번 염색체 끝부분에 CAG라는 기호서열이 40번 이상 반복되면 확실히 발병한다. 30번 이하이면 발병하지 않는다. 41번이면 대략 51세에, 42번이면 37세에, 50회면 27세 무렵에 지능을 잃는다. 지금은 이 유전자를 가졌는지 간단히 테스트할 수 있고, 배아 단계에서 결함 부분을 잘라내고 인공수정을 할 수 있는 수준까지 왔다.
50%의 발병 확률을 가진 낸시는 자신의 노력으로 가능하게 된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기로 한다. 필자는 가끔 그녀의 근황을 살펴보곤 했다. 오랜만에 그녀의 인터뷰 영상을 보았다. 2016년 71세인 그녀의 어깨와 팔이 춤추고 있었다. 슬프게도, 여전히 밝은 얼굴로. 75세의 그녀는 더 악화하였을 것이다. 신경심리학 전공으로 생명과학과 컴퓨터 알고리즘의 한 분야에 거대한 추동력을 제공한 거인에게 감사와 연민의 마음을 전한다.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부 문병로 교수